송광사(松廣寺) 조계총림 이야기

관리자
2020-08-11
조회수 235

글쓴이 : 조계산방          

작성일 : 2009-09-24 12:36:39


승보도량 조계산 송광사(松廣寺) 조계총림(曹溪叢林) 이야기


송광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조계산 자락에

마치 한송이 연꽃처럼 아늑한 새둥지처럼 자리잡고 있다.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가지 전설이 있다.

그 첫째는 18명의 큰스님들이 출현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칠 절이라는 뜻이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보조 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慧璘)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송광산 길상사(吉祥寺)였으며 100여 칸쯤 되는 절로 30, 40명의 스님들이 살 수 있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절이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인종 때 석조(釋照)대사께서 절을 크게 확장하려는 원을 세우고 준비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페허화된 길상사가 중창되고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부터이다.


지눌스님은 10년 동안의(명종 27년1197년 ~ 희종 원년) 중창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 때부터 송광사가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정유재란, 6.25사변 등 숱한 재난을 겪었으나 지속적인 중창불사로 지금의 위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 제 1차 중창


석조 대사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폐허화된 길상사가 새로운 규모로 중창되고 한국 불교의 중심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지눌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이다. 지눌은 9년동안의(명종 27년, 1197~희종 원년, 2004) 중창 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 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드디어 송광사가 한국 불교의 중심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거조사로부터 길상사로 정혜결사를 옮겨와 수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가까운 곳에 정혜사라는 절이 있어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산이름도 송광에서 조계로 바꾸었다. 뒤에 절 이름도 수선사에서 송광사로 불리게 되어 조계산 송광사로 되었다.



* 제 2차 중창


지눌이 타계한 다음 그의 법을 이는 진각 혜심(眞覺 慧諶) 스님은 수선사의 전통을 이어 선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자 다시 절이 비좁게 되었다. 강종(康宗)이 이 소식을 듣고 명을 내리어 절을 크게 증축하였다.



* 제 3차 중창


혜심 스님이후 180년이 지난 조선조 초 16국사의 마지막 분인 고봉화상께서 원을 세워(1395년) 유서 깊은 도량을 중창하기 시작하였다. 고봉의 뜻을 계승하여 중인(中印)선사께서 중창 불사를 완성하여 90여 칸의 증축을 하였다한다.



* 제 4차 중창


정유재란으로 침입한 왜군이 불을 질러 역사적 도량은 일시에 잿더미로 변하였다. 이에 응선(應禪)화상께서 복구의 손을 대기 시작하였고 드디어 지리산에 계시던 부휴 대사를 모시어 불사를 완성했다고 한다. 이때 600여 명의 제자들이 송광사에서 부휴 대사의 지도로 공부했다고 한다.



* 제 5차 중창


헌종 8년(1842)에 큰불이 나 대웅전을 비롯한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다. 정유재란 이후 두번째 겪는 수난이었다. 불이 난 이듬해부터 절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 시작되어 철종 7년(1856)까지 무려 14년의 시간이 걸려 2,150여 칸이 다시 세워졌다.



* 제 6차 중창


5차 중창으로부터 70, 80년 뒤인 1922년에 주지 설월(雪月)스님과 율암(栗庵)스님에 의하여 1928년까지 퇴락한 건물들을 고치고 개와를 바꾸는 등 전반적인 중수가 있었다.



* 제 7차 중창


1948년에 일어난 여순반란과 6.25사변의 발발은 조계산 송광사 일대를 공비의 노략과 살육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산중에 은신한 이들 공비를 토벌하기 위하여 국군 토벌대는 작전상 절 주변의 숲을 벌채하게 되었다. 이에 격분한 공비들이 1951년 2월 절을 지키던 노인들을 학살하고 5월에는 절에 불을 질러 대웅전 등 중심부를 불태워 버렸다. 1955년부터 주지 금당(錦堂)스님과 화주 취봉(翠峰)스님의 원력으로 5년 동안에 걸쳐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을 복구하였다.



* 제 8차 중창


1969년 봄.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2총림으로 조계산 송광사에 조계총림이 개원되었다. 이에 방장화상으로 추대된 구산(九山)스님께서는 송광사를 승보종찰다운 수행도량으로 가꾸라는 은사 효봉(曉峰)스님의 유촉을 받들어 헌신적인 원력과 신념으로 오늘날의 송광사가 있도록 그 기틀을 마련하였다.


1983년 4월. 구산(九山) 방장스님는 송광사 제8차중창불사를 발원하고 그해 11월 홀연히 입적하시자, 후임 방장스님으로 일각(一覺)스님을 모시고 주지 현호(玄虎)스님을 중심으로 하여 스님의 탑을 세우는 마음으로 중창불사를 계속하였다.


이에 많은 문도들과 함께 전국불일회원과 사부대중들이 뜻을 같이하여 108평 아자형 대웅보전을 비롯 30여동의 전각을 신축하거나 중수하여 승보종찰 송광사 조계총림 도량의 모습을 일신하였다.


그리고 지금도 효봉 스님과 구산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서 후임 방장이셨던 일각(一覺)스님과 현 방장이신 보성(菩成)스님을 증명으로 하여 현고(玄고)스님, 현지(玄志)스님, 현봉(玄鋒)스님, 영조(永照)스님 등 역대 후임 주지스님들이 계속해서 승보도량의 면모를 장엄하게 가꾸고 있다.



~ Gate Gate(아제 아제) * deva premal & miten ~


















































[사진설명]


~ 승보종찰 조계산 송광사 조계총림 도량의 정겨운 여름풍광, 2007년 8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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