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도행보살과 고려사와의 인연 이야기

관리자
202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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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도행(金大道行) 보살과 고려사(高麗寺)와의 인연 이야기 ~


* 청신녀(淸信女) 김해유인(金海孺人) 김정선(金貞瑄) 대도행(大道行) 보살님은 경남 진주시 평안동 331번지에서 김해후인(金海後人) 김진호(金溍浩)를 아버지로 경주유인(慶州孺人) 이상달(李上達)을 어머니로 1927년 정묘년(丁卯年) 음력 4월 16일에 2남 2녀 중 막내인 차녀로 출생하였습니다.

* 1929년 3세 :
모친과 사별하고 부친은 독립운동가로서 만주로 떠난 후, 외조부 경주후인 이현종 선생과 외조모의 보살핌으로 유년기를 보내셨습니다.

* 1933년 7세 :
외조부의 주선으로 진주 보통학교(한국인 학교 6년)와 진주 고등보통학교(일본인 학교 2년)을 다녔습니다.

* 1942년 16세 :
아버지가 일찍이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조국의 독립운동을 하다가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생활을 한 후, 중국 상해의 임시정부와 만주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고종사촌 언니가 살고 있는 함경도 함흥까지 아버지를 찾아 갔습니다.

* 1943년 17세 :
고종사촌인 김일묵(金一黙) 형부의 주선으로 부친을 찾아뵙기 위해 함경도 함흥에 갔으나, 부친은 뵙지 못하고 형부의 주선으로 함흥 신명여고를 1년간 다니다가 그만 서울로 가출하였습니다.

* 1944년 18세 :
낯선 서울에 온 어린 소녀는 우연히 일본사람들이 운영하는 하나(Hana)악극단과 성보(城寶)악극단에서 무용수 단원모집 광고를 보고서 무작정 찾아갔다가 여기에서 작곡가요, 지휘자인 이재호(李在鎬) 선생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있게 되였습니다.

* 1945년 19세 :
1919년 기미생(己未生, 음력 10월 14일생)인 이재호와 결혼하여 진주 시부모님 댁에서 동양화가이며 국악인이신 시아버지 이선직 처사와 조선조 궁녀 출신으로 불심(佛心)이 깊은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면서 슬하에 다음과 같이 4남 1녀를 두였습니다.

- 장남 1946년 병술생(03월 29일) 이범승(李範昇)
- 차남 1949년 기축생(12월 24일) 이범익(李範益)
- 삼남 1953년 계사생(03월 20일) 이범용(李範龍)
- 사남 1955년 을미생(01월 01일) 이법수(李範수)
- 장녀 1957년 정유생(03월 20일) 이혜경(李惠慶)

* 1959년 33세 ;
남편인 이재호(李在鎬) 선생과 홀연히 사별한 후, 4남 1녀를 양육하고 교육시키기 위해 고향인 진주를 떠나 부산으로 이사하여 스스로 현실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1961년 35세 :
부산에서 다시 서울로 상경한 후에는 오직 슬하에 4남 1녀를 잘 교육시키기 위한 신념으로 삶의 터전을 마련하면서 갖은 고뇌와 피나는 노력으로 생활하였습니다.

* 1965년 39세 :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대원각(大苑閣)이라는 대중음식점을 개점하여 국내외적으로 큰 호응을 얻은 명소로 수년간 자리매김하다가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사업을 정리하고서 미국 이민생활을 선택하였습니다.

* 1969년 43세 :
미국으로 이민한 후에는 Los Angeles 다운타운의 Hilton Hotel에 ″대원각″이란 이름으로 식당을 운영하다가 다시 ″Madam Kim″s Restaurant″으로 개명하여 운영하면서도 한국의 전통문화와 오랜 역사를 간직한 불교문화를 미국사회에 널리 선양하리라 스스로 다짐하였습니다.

* 1973년 47세 :
1972년부터 북가주 Carmel에 한국불교 최초의 전통사찰인 삼보사(三寶寺)가 이한상 덕산(德山)거사님의 원력으로 건립불사가 시작되여, 1973년 봄에 삼보사를 완공하고 개원되자, 바로 뒤이어 숭산(崇山) 행원스님의 발원으로 L.A.에도 달마사(達摩寺) 살립되자 평소 불교신자로 불심(佛心)이 깊던 터에 불교를 홍포해야겠다는 신심이 다시금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 1976년 50세 :
L.A. 다운타운 Hilton Hotel의 "Madam Kim″s Restaurant "을 정리하고 달마사 회주(會主)스님인 숭산(崇山) 행원(行願)스님과의 인연으로 다시 김대도행(金大道行)이란 불명(佛名)을 받고 달마사 원주(院主) 소임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 1979년 53세 :
그러던 차, 1975년 가을부터 1979년 가을까지 3차에 걸쳐 세계 일주 여행을 하고 있던 순천 송광사(松廣寺)의 현호(玄虎)스님을 미국 L,A. 달마사에서 세 차례나 만난 인연이 성숙되었습니다. 이에 대도행 보살님은 뜻있는 분들과 함께 한국에 유일하게 송광사에 국제선원이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면서 송광사 L.A.분원을 미국에도 설립하자고 발원한 것이 계기가 되어 드디어 고려사(高麗寺) 건립불사가 시작되었습니다.

* 1980년 54세 :
1980년 7월 30일 종교법인 고려사(Korea Sah Buddhist Temple)를 미국 California 주정부 설립허가 받고, 비영리종교단체 고려사(高麗寺: Korea Sah Inc.) 재단법인 이사회 구성 및 정관 채택하였습니다. 그리고 1980년 12월 21일. 드디어 시절인연이 성숙되어 송광사 조계총림(曹溪叢林)의 방장(方丈)이신 구산(九山)스님을 모시고 송광사 조계총림 L.A.분원 고려사 신도회인 L.A.불일회(佛日會)를 결성하고, 역사적인 고려사 개원법회를 봉행하였습니다.

* 1987년 61세 ;
1987년 봄. 순천시 조계산 송광사 불일암(佛日庵)에 거주하던 법정(法頂)스님이 현호스님의 주선으로 미국 고려사를 방문하여 8개월 동안 안거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서울 성북구 성북동의 대원각의 소유주인 김영한 여사가 김대도행 보살과 함께 고려사에 함께 머물고 있었습니다. 평소 김영한 여사도 송광사 서울분원 법련사(法蓮寺)의 김법련화 보살님처럼 후세에 길이 남을 보람된 일을 하고 싶다고 평소에 자주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일부러 법정스님과 상면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우여곡절 속에 10여년이란 세월이 흘러 가까스로 길상화(吉祥華)란 불명을 받고, 또 절을 길상사(吉祥寺)란 이름으로 송광사 서울분원으로 종단에 등록하고 개원법회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김대도행 보살님의 막중한 숨은 공덕의 결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때마침 이때가 바로 정묘년 김대도행 보살님의 회갑(回甲)이라, 법정스님과 함께 지상의 낙원이라는 하와이(Hawaii)와 미국 서부대륙을 두루 여행하고 난후, 또다시 미국 동부와 중부의 대도시와 유명한 관광지와 국립공원 등을 3개월동안 답사하였습니다.

- 2002년 76세 :
1980년 고려사를 개원하고 주지에 취임한 현호스님은 1983년 봄부터 구산스님의 간곡한 뜻에 따라 송광사 주지소임에 취임하여 10여 년간 제8차 중창불사가 봉행하고 난후, 또다시 1993년부터 송광사 서울분원인 법련사 영산대법전(靈山大法殿) 건립불사를 5년간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는 1998년 12월 28일 은사스님의 추모기일을 즈음하여 일체사(一體事) 도방하(都放下)하고 재출가(再出家)하는 심정으로 하와이 와불산(臥佛山) 금강굴(金剛窟)에서 3년간 은거(隱居)하다, 고려사 이전불사 관계로 부득불 지난 2002년도 봄에 고려사에 다시 귀사하였습니다. 그러니 20여년동안 고려사의 원주소임과 종교법인 재단 이사회의 총무이사까지 맡고 있던 대도행 보살님의 노고와 심정은 어찌했겠습니까.

- 2003년 77세 :
돌이켜보면 고려사가 1980년 처음 개원했던 곳이 <239 S. Wilton Pl. L.A. CA 90004> 이었는데, 이곳은 바로 주택가이었기 때문에 부득불 이전해야만 하였으며, 또 1986년에 옮긴 곳은 <4027, 4033 W. Ingraham St. L.A. CA 90005>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도 L.A.시교육청의 초등학교 신설계획으로 인해 할 수 없이 제3차에 걸쳐서 이전불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고려사의 건물은 뜻밖의 귀중한 인연으로 매입하게 되었는데, <500 N. Western Ave. L.A. CA 90004> 에 있는 건물로서 L.A.시문화재로 등록된 유서 깊은 건물입니다. 돌이켜 보면 마치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처럼 고려사의 이전법회를 세 번씩이나 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수고가 많았던 분은 바로 김대도행 보살님이었습니다.

- 이와 같이 김대도행 보살님이 고려사에 몸담아 계신지도 어언 35년이란 세월이 흘렸습니다. 그동안 미국 고려사를 개원한 이래 국내외적으로 방문하는 많은 스님들과 신도님들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피시고, 한결같은 원력과 신심으로 고려사가 3차의 이전불사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면서 고려사가 무난히 유지되고 있는 것도 몸과 마음을 다 바친 보살님의 장한 신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그리고 간혹 고려사에 몸담고 있는 어머님과 할머니를 뵈러오는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을 반기고 마냥 기뻐하던 대도행 보살님의 환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저 애들이 모두 시아버지를 닮아서 대대로 저렇게 음악에도 소질이 있고, 막내딸은 그림도 잘 그린다고 자랑하면서 시부모님의 이야기꽃이 보살님의 얼굴에 활짝 피던 일이 엊그제 같습니다.

- 시아버지 이선직 선생은 국악(國樂)과 동양화(東洋畵)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시어머님은 불심(佛心)이 깊은 궁녀(宮女) 출신으로 집안 살림살이며 음식솜씨가 뛰어났다며, 우리 장남이나 장손과 그리고 막내딸이 4대(四代)를 결처 시부모님들을 닮았다고 하면서 천진스럽게 이야기하던 보살님의 모습이 더욱 그립습니다.

* 2015년 89세 :
김대도행 보살님은 하안거 해제인 7월 백중법회가 끝나고부터 약간의 미질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보살님은 스님들과 신도들에게 누를 끼쳐선 안 된다며 막내딸인 효녀 심청네 집으로 이거를 하였지만, 마음만은 늘 고려사 도량에 있다면서 한결같은 신심으로 염불삼매(念佛三昧)속에서 투병생활하고 있습니다.

* 2016년 90세 :
새해를 맞이한 설날, 불편한 몸을 이끌고 효녀심청 내외분이 대도행 보살님을 모시고 고려사 법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무척 쇠잔해진 모습에 마음이 아파 2년 전부터 고려사 도량에 당신이 심고 가꾸신 보리수나무 밑의 평상에 앉아 가끔 지난날의 삶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것을 다시 회고하면서 김대도행 보살님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다시금 상기하다보니 미숙한 점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 그러나 한 인간으로써, 한 어머니로써, 한 불교신자인 보살로써 하고 많은 이야기며 그 많은 사연들을 어찌 다 말과 글로써 표현하오리까. 하지만 지금은 효녀심청인 막내딸 혜경이와 효심 깊은 사위인 이상열 씨의 집에 있으면서 온 가족들의 정성스러운 보살핌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으니,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입니다.

- 평소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염불수행으로 기도정진했던 대도행 보살님과 전화할 때마다 늘쌍 부촉하기를 ‘오나가나 관세음’, ‘자나 깨나 관세음’, ‘앉으나 서나 관세음’, ‘죽으나 사나 관세음보살’이란 관세음보살 염불삼매 속에 생활하시기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 다시금 돌이켜 보니 김대도행 보살님이 수시로 나에게 가끔 들러주셨던 많은 이야기들을 다 기억할 수가 없어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적다 보니 미진한 점이 많으라 생각됩니다. 거듭 많은 이해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2017년 2월 11일 정유년(丁酉年) 동안거(冬安居) 해제일(解制日)을 기다리면서...

미국 L.A. 성림산(聖林山) 고려사(高麗寺) 한주(閑住) 현호(玄虎) 삼가 기록하다.


* 가족 관계 :

- 자녀

- 자부

- 서랑

- 손자

- 손녀

- 증손자

- 증손녀



* 보충할 것

- 이재호 음악상? 수상에 관한 이야기
- 이재호 진주 기념탑?

- 김대도행 2남 2녀 관계 이야기?
- 장남;
- 차남;
- 장녀; 김명선(金命善)
- 차녀; 김정순(金貞順)을 후에 김정선(金貞瑄)으로 개명함.




~ ♪ The Violent Coloured Mountains ♪ ~


~ 1980년 12월 21일, 미국 L.A. 고려사 개원법회 기념사진 ~








































[사진설명]

~ 별명이 효녀 심청인 혜경이네 집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는 고려사 창건 공덕주인 김대도행 보살님.
4남 1녀 중 막내딸인 ″김혜경″님과 사위 ″이상열″씨와 시어머님을 모시고 화목하게 살고 있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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