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세 고승 : 동산(東山) 대선사

관리자
2020-06-22
조회수 313


글쓴이 : 법련사    

작성일 : 2004-09-06 오후 2:23:45


한국 근세 고승 : 東山 



세상이 시끄러울 때마다 고승들의 지혜와 덕화는 한층 그리워지게 마련이다. 종단 안팎에서 잇따라 터지는 사건사고들로 불자들의 마음이 한층 스산해진 이즈음, 법보신문은 격변기를 살아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현대 고승20분을 선정해 고승들의 생애와 사상, 일화와 후학들에게 끼친 영향, 교훈 등을 하나하나 점검해 나가기로 했다. 이 기획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바르고 참다운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불자들의 등대가 될 것이다. `현대 고승 20선"에 선정된 고승은 동산 효봉 금오 청담 전강 경봉 향곡 탄허 혜암해안 구산 운허 춘성 설봉 고암 성철 경산 지월 월산 서옹 스님이다.〈편집자〉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큰 법당이 무너졌구나. 

어두운 밤에 

횃불이 꺼졌구나.” 


봄비가 마악 개인 1965년의 4월 어느 날, 정화도반의 입적 소식을 접한 청담은 도반의 법체 앞에서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정화불사의 선봉에 서서 언제나 진리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결연한 위의를 잃지 않았던 도반, 설법제일이라는 별호에서처럼 일단 사자좌에 앉아법문을 시작하기만 하면 그 청산유수와 같은 감로법문으로 수백수천의 법석을 마치 물 끼얹은 듯 적막하게 만들었던 도반을 보내는 청담의 마음이 어찌 아리지 않았겠는가. 


청담은 그러나 이내 그 슬픔을 억장을 내지르는 할로서 회향시켰으니, 내용인즉 이렇다. 


“동산이 물 위에 떠다니니 일월이 빛을 잃었도다. 어억! 

봄 바람이 무르익어 꽃이 피고 새가 운다.” 


청담에게 해와 달이 한꺼번에 빛을 잃은 듯한 애별리고를 남겼을 만큼 동산의 생애는 완벽한 수행자의 전형이었다. 육신의 병을 고치려 의학을 공부하는 도중 각별한 인연으로 보다 근원적인 인생의 병을 고치고자 대도에 들어선 후 동산은 수행자로서 한 점 흐트러짐이 없는 삶을 살았다. 세상과의 인연을 다하기 불과 사흘 전, 을사년 3월 보살계산림을 맞아서도 동산은 연3일간의 설법을 마쳤을 정도로 전법이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다. “몸이 좀 고달프다고 해서 중이 설법을 해달라는 청을 거절할 수가 있어야지 …” 


하기야 스님은 입적 당일에도 전과 다름없이 대중들과 함께 예불을 드리고, 공양과 청소를 한 후 저녁 노을이 대숲 사이로 그 잔영을 삐끔 들이밀즈음 홀연히 입적에 들었으니, `마치 일상생활이 기계와 같았다"는 측근의평가는 전연 과장이 없었음이다. 


동산은 24세 되던 해, 당대의 고승 용성진종 화상을 은사로 스님이 됐다.그 뒤부터 한암 선사에게 사교를 익히고, 다시 영명 강백에게서 대교를 수료했다. 그 후 백양사 운문암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 오대산과 금강산, 속리산 등 전국의 유명선원을 옮겨다니며 서래의 종지를 참구했다. 그러기를 10여년, 범어사 금어선원 동쪽 대나무 밭 옆을 화두삼매에 들어 거닐다가 문득 이는 바람에 대 부딪끼는 소리를 듣고 확철대오하니 마치 1,000근의 짐을 벗은 듯했다. 

동산은 이미 명명해 질대로 명명해진 석가여래의 비밀스런 뜻을 꿰뚫은 기쁨을 이렇게 노래했다. 


“그리고 그린 것이 몇 해던가 

붓끝이 닿는 곳에 살아 있는 고양이로다 

하루 종일 창 앞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고 

밤이 되면 예전처럼 늙은 쥐를 잡는다.” 


畵來畵去幾多年 

筆頭落處活猫兒 

盡日窓前滿面睡 

夜來依舊捉老鼠 


동산이 이 경지를 은사 용성 화상에 고하니 화상은 두 말없이 흔연히 인가했다. 


“모름지기 공부하는 사람은 계행을 깨끗이 해야 한다. 더러 보면 계를 우습게 알고 부처님과 조사의 말씀을 믿지 않은 이가 있다. 분명히 말하건대 부처님이 그렇게 행한 일이 없고 조사 또한 그렇게 한 일이 없다.” 


동산이 후학에게 늘 당부하고 들려준 말이다. 이처럼 이미 서래의 밀지를 확연히 타파한 동산이었지만 계맥을 전수받아 한국불교 발전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데도 큰 족적을 남겼다. 

동산이 전수받은 계맥은 두 가지. 그 첫째는 석가세존에서 우바리 존자로 전해진 계맥이 인도와 중국의 역대 율사를 거쳐 한국의 만하 율사에 이르렀다가 다시 여러 율사를 거쳐 용성과 동산에 이어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리산 계맥으로 칠불선원의 대은 율사가 부처님을 직접 친견해 받은 율맥을 역시 면담, 범해, 초의, 선곡, 용성에 이어 전수받은 것이다. 


이후 동산은 범어사에 금강계단을 세우고 1943년 전계대화상으로 등단한 이래 많은 불제자를 배출했다. 동산은 금강계단 이외의 계단에서는 주로 지리산 계맥을 전수하였는데, 그로부터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은 사부대중은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동산의 사상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을 꼽는다면 그것은 철저한 지계정신이다. 그의 계율에 대한 철저함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해이해질대로 해이해진 한국불교의 기강을 새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정화불사를 일으키는 기폭제가 됐다. 정화를 통해 종단의 기틀을 형성한 오늘의 조계종은 바로동산의 계율을 지키려는 투철한 정신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동산의 지계정신이 빛을 발한 것은 무서울 정도로 엄격한 언행일치의 삶 때문이다. 동산은 입적에 들던 날까지 아침저녁으로 예불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만일 후학이나 대중 중에 예불을 거르는 사람이 있을라치면 곧바로“시주의 은혜를 축내는 나쁜 놈”이란 불호령이 떨어졌다. 또 아침이면 제일 먼저 빗자루를 들고 도량을 청소했는데, 오가는 사람들이 매일 아침 비질을 하는 연유를 물으면 그 즉시 “국토를 맑게 하는 일이 곧 마음을 맑게 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구린데가 없으니 걸릴 것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 동산은 때때로 거침없는 기개와 두둑한 배포를 보이곤 했는데, 필연 이는 스스로에게 철저하게 엄격한 삶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리라. 


6·25 한국전쟁이 끝난 후 어느 날 범어사에서 전몰희생자 위령재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주한미군 사령관 등 군장병, 외교사절이 참석했다. 그런데, 문득 동산의 눈에 이 대통령이 유엔군사령관과 함께 자리에 앉아 있다가 손가락으로 부처님을 가리키는 모습이 들어오는 게 아닌가. 


“한 나라의 대통령이 어디 부처님께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가!” 지체없이 동산의 추상과 같은 질책이 터져 나왔음은 물론이다. 워낙 기세가 당장이라도 내리칠 듯 등등한지라 대통령은 머쓱한 얼굴로 중절모를 벗어 들고는 “미군사령관과 외교사절에게 부처님을 소개하려다가 그만 실수를 했소이다”라고 사과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태국의 종정과 총무원장 일행이 내한을 했을 때에도 동산의 걸림 없는 혜안은 빛을 발했다. 당시 총무원은 육식을 허용하고 있는 태국불교의 사정을 감안해 이들에게 육식음식을 제공했는데, 공양을 마친 후 한 스님이 물었다. 

“우리 대승불교 교단에서는 스님들의 육식을 금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태국불교에서는 육식을 합니까?” 

태국의 총무원장이 답했다. 

“죽은 고기도 마음에 걸려 먹지 못하면서 어찌 산 고기를 제도한다고 하십니까?” 

질문을 던진 스님은 한 방을 되게 얻어맞은 후 할 말을 잃었다. 좌중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이때 한 스님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태국에도 도인이 있습니까?” 

태국의 총무원장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마음이 열리고 나면 두두물물 화화초초가 도인 아님이 없지요.” 

두 번째 질문을 한 스님도 말문이 막혔다. 정식 법거량은 아니었지만 태국스님에게 계속해서 당하는 형국이 아닐 수 없었다. 


이튿날 태국의 승려들이 불국사를 방문했다. 태국 승려들은 안내를 하는 한국의 스님들에게 “대승불교가 꽃을 피웠다는 한국에 와서 대승선에 능통한 스님을 뵙기를 원했으나 아직 만나지 못해 서운합니다.”라며 기고만장했다. 여기에는 대승 불교권에서 자신들의 불교를 소승으로 폄하하는 데 대한 설욕이라는 측면도 없지 않았으리라. 동산은 이들보다 먼저 불국사에 도착해 있다가 직접 도량안내를 했다. 다보탑에 이르러 일행의 눈길이 탑위의 석사자에 머물자 동산이 물었다. 


“저 사자가 보입니까?” 

“예, 보고 있습니다.” 

“저 사자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 …. ” 

“내가 당신들에게 줄 선물은 이것 뿐이요.” 


그동안 태국 승려들에게 당했던 모욕을 일거에 되갚는, 또 동산의 탁월한 안목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훗날 태국 승려들이 한국불교에 대승선을 아는 이가 없어 실망했다는 말을 취소하고 백배 사죄한 후 동산을 참으로 훌륭한 스님으로 침이 마르게 칭송을 했음은 물론이다. 

언제나 근엄했고 때론 서릿발 같이 엄격했지만 동산의 영토에는 늘 관세음보살의 품안 같은 따사로움이 넘쳐 흘렀다. 동산은 늘 그랬듯이 오는 사람은 막지 않았고, 가는 사람 또한 잡지 않았다. 그가 머물렀을 때나, 일대사의 인연을 접었을 때, 그리고 그의 육신이 떠난 후까지도 언제나 금정산엔 동산을 따르는 눈푸른 납자와 신도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으니, 가히 동산은 은산철벽을 뚫고도 남을 예리한 지혜와 영겁을 축내도 모자람이 없는 복덕을 갖춘 대복전이었다. 


파스칼의 원리? 밀폐된 유체의 한 부분에 힘을 주면 그 힘이 유체 안의 모든 곳에 같은 크기로 전달되는 이치다. 프랑스의 물리학자 파스칼이 발견한 법칙인데, 중학생 시절 물이 가득 찬 구멍 뚫린 고무공을 손가락으로 지긋이 누르면 물줄기가 사방 상하로 고르게 퍼져 나가는 간단한 실험을 통해 배웠던 바로 그 원리라고 한다면 이해가 빠를 터. 그런데, 예서 돌연 파스칼을 들먹이는 것은 동산이 마치 파스칼 원리가 입증한 것처럼 모든 면에서 두루 완벽한 선지식이었음을 말하고자 함이다. 


실로 동산은 참선정진은 물론이요, 지계와 교학, 전법, 불사, 도제양성 등 어느 한 곳에도 기움이 없었다. 관응 대강백이 `조계종 종정은 동산 스님한 분으로 족하다″며 감탄을 했다는 이야기는 그의 그릇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동산은 복덕과 지혜를 모두 갖춘 스님이다. 하나가 차면 다른 하나가 기우는 것이 세상의 보편적 이치이련만 동산의 그릇은 문자 그대로 양족존(兩足尊)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었음이다. 


그가 가는 곳이면 아무리 곤궁한 사찰도 신도와 보시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기왓장 사이로 빗물이 새고, 감자 한 두 알로 허기를 달래던 사암들도 일단 동산의 언설과 발길이 맴돌기만 하면 구름처럼 신도가 모여들고, 몇년을 먹고도 남을 양식이 마련되곤 했으니 그 복덕의 크기는 참으로 희유한 것이었다. 상좌 정관이 은사를 일러 `우리 스님은 바다 같은 스님″이라 한것은 다 이런 연유 때문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은 우리 스님이 법회만 열었다 하면 어디서 그렇게 사람이 몰려왔는지 법석이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일입니다. 물 흐르듯 흐르는 유창한 법문은 차치하고 그저 부처님처럼 훤한 스님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고 근심걱정이 사라진다고 모두들 흡족한 기쁨에 취했었지요. 그래서 우리 제자들은 은사스님을 일러 `복을 몰고 다니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동산은 그가 보여준 화려한(?) 살림살이 만큼이나 많은 일화를 남겼다. 


어느 해, 만공·효봉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동산이 만공에게 묻길 “천하에 살인하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는데 그게 누굽니까?”라 했다. 만공이 답하기를 “오늘 여기서 보았노라”라고 했다. 다시 효봉이 만공에게 “스님의 머리를 취하고 싶은데 허락하시겠습니까?”라고 묻자, 만공이 그 답으로 목을 길게 빼어 내밀었다. 다음은 만공이 물을 차례. 지체없이 “제석천왕이 

풀 한 줄기를 땅에 꽂고 부처님께 여쭙기를 `범찰을 지어 마쳤습니다.″고 하니 세존이 웃으셨다는데, 그 뜻이 무엇이겠는가?”물었다. 이에 동산은 “스님은 절 짓기를 좋아하십니다”라고 답했다. 


한번은 시자가 동산에 물었다. 

“영명연수 선사는 만일 심장과 간을 도려내어도 목석과 같이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은 고기를 먹어도 괜찮다고 말하셨는데, 정말 그래도 되는 겁니까?” 

“그러니 먹지 말라는 것이야.” 

“술을 먹되, 오줌 똥을 먹는 것과 같은 사람은 술을 먹어도 된다고 하셨는데 ….” 

“그러니 마시지 말라는 것이지.” 

“미인을 보고 시체나 다름없이 보는 사람은 음행을 해도 된다고 하셨는데….” 

“그러니 음행을 하지 말라는 뜻이지.” 

“이해가 안갑니다. 걸림이 없는 사람은 어떤 일에도 구애됨이 없다는 뜻이 아닌가요.” 

“딱도 하구나! 걸림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술·고기·여자를 취하지 않는 법이지. 그러니 걸림이 없는 경지에 이르지 못한 범부가 이를 취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이를 명심해야 하느니 ….” 


출가 이후 동산은 은사의 부촉으로 평안도 맹산 우두암에 있던 한암을 찾았다. 

몇날 며칠이 걸려 우두암에 도착한 동산은 심신이 지칠대로 지쳤으나 가르침을 향한 열정에 촌각을 허비할 수 없었다. 한암이 동산의 의중을 떠볼 요량으로 한 마디 일렀다. 

“자네의 방부를 받지 못하겠으니 돌아가라 이른다면 어찌하겠는가?” 

“암자 밖 바위 틈에 토굴이라도 파고 먼발치에서나마 스님을 모시겠습니다.” 

마침 날이 어둑해지면서 산짐승의 울음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한암이 다시 물었다. 

“자네 저 소리를 듣고 있나?” 

“예, 듣고 있습니다.” 

“저 소리를 듣고서도 바위 틈에 토굴을 파시겠나?” 

“도를 구하지 못하고 취생몽사하느니 차라리 도를 구하다 토굴에서 짐승에 물려 죽겠습니다.” 

동산의 결연한 모습을 지켜본 한암이 빙그레 웃었다. 

“남의 집 자식이라 내쫓지도 못하겠구나 …. 예서 머무시게.” 


동산은 매일 일과로 도량청소를 빠뜨리지 않았다. 하루는 절 마당을 쓸고 있는 동산과 마침 지나던 행자가 마주쳤다. 비질을 하는 조실스님을 보고 안절부절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행자는 황급히 다가가 “청소는 제게 맡기고 그만 쉬시라”고 여쭈었다. 동산이 행자에게 말했다. 

“마당을 쓰는 것도 내 수행이야. 공부를 방해하지 말게나.” 


청담은 동산이 입적한 후 기리는 글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정화불사 당시 대처측의 방해로 정화운동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비장한각오로 사자후를 토하며 순교단식을 감행한 것이나, 조계사 법당에서 단식기도를 하는 중에 대처측이 몰려와 뭇매를 가할 때도 꿈쩍도 하지 않고 당당히 감당하던 일이 생생합니다. 조계사에 입주해서 대처측과 함께 살던 때에 비구승을 쫓아낼 생각으로 거처에 장작불을 처넣었어요. 장판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음에도 결사적 투지로 끝내 방을 비우지 않는 일은 그가 아니면 불가한 일이었지요.” 


성철은 은사 동산의 입적을 당해 

“영골사리 청정 찬연하니 

부처가 실색하고 달마가 점두하도다. 

한 여름에 서리 내리고 엄동에 꽃이 찬란하도다.” 

靈骨舍利 

淨兮燦然 

黃頭失色 

碧眼點頭 

라며 스승을 잃은 슬픔을 달랬다. 성철은 이어 스승의 사리탑에 

“봉황은 예천을 마시고 

기린은 경림에 깃들었도다. 

성주가 홀을 잡고 춤을 추니 

시골 늙은이가 한껏 노래 부르네.” 

鳳飮醴泉 

麟棲瓊林 

聖主舞笏 

野老謳歌 

라는 노래(頌)를 지어 올렸다. 


동산은 물러섬이 없는 신심을 지닌 `진짜 중″이었다. 한 시도 수행자로서 흐트러짐이 없었고, 조석 예불시에 언제나 대중보다 먼저 나와 각 법당을 두루 참례하는 일을 한 차례도 거르지 않았다. 사시마지나 조석예불 시간에는 설사 중요한 손님을 맞는 도중이더라도 거침없이 일어나 예불에 참석한 일화는 유명하다. 입적 순간까지도 사분정진을 빠뜨리지 않은 일, 수행납자가 찾아오는 것을 즐거워하고 한 사람이라도 떠나면 섭섭히 여기며 만류하던 일, 성난 파도처럼 꾸짖다가도 이내 무심한 얼굴로 돌아와 평상의 도를 보이 던 일 등은 그가 다시 만나기 어려운 선지식으로 추앙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들이다. 


다양한 삶의 족적을 남긴 동산의 사상을 한마디로 간추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굳이 그의 사상을 정리한다면 투철한 수행정신과 철저한 지계정신으로 크게 대별된다. 설사 동산이 아니더라도 수행인이라면 누구나 지녀야할 것이긴 하지만, 그의 살림살이가 유독 두드러지게 빛나는 것은 동산이 일생동안 경영한 일상의 생활 속에 그의 정신이 온전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의 지계정신이 오늘에도 범어사 단일계단으로 연면히 이어져 옴은 이런 맥락에서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동산은 머물던 염화실의 머리맡에 놓았던 친필 좌우명은 그의 성격 양상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서리를 인 소나무의 깨끗한 지조와 물 속 달의 텅 빈 걸림없음이여” 

霜松潔操 水月虛襟 


두 번이나 종정직을 수행한 동산은 다시 범어사로 돌아온 후에도 `하루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라는 청규를 누구보다도 앞장서 실천했다. 

입적하기 사나흘 전 동산은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보살계를 설했다. 마지막 법석인 이 회상에서 그는 대중들에게 자신의 입적을 알렸다. 

“나는 다시는 이 자리에 오르지 못할 것이니, 그동안 들은 보살계 법문을 마음에 새겨 열심히 정진하시오.” 

그리고, 자신의 영정에 열반게를 남겼으니 이렇다. 


“원래 일찍이 전한바 없거니 

다시 어찌 제2신이 있으랴. 

백년이라 3만 6천 날이 

다 이놈의 반복일 뿐일세.” 

元來未曾轉 

豈有第二身 

三萬六千朝 

反覆只這漢 


하루의 일과를 마치 기계처럼 철저히 지키는 것은 물론이요, 일생동안 대중생활을 통해 도반이나 후학들에게 귀감이 된 동산의 오도적 삶은 광활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누구든 그 앞에 서면 말로 표현 못할 중압감을 느낄수 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중압감 속에는 한없는 자비로움과 따사로움이 충만하였으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아마도 오늘의 조계종은 동산이라는 걸출한 선지식이 없었다면 없었을지도 모른다. 종단적 기틀을 만든 것이나 종단의 지향점을 제시한 것이 모두 동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덕화가 하도 광활한 때문인가. 가신지 35년이 흐른 오늘에도 동산가풍(東山家風)은 수그러들 줄 모르고 꿈틀거리고 있으니. 


~~ 그대 빛을 볼수 있는가 ~~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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