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봉 스님 열반 50주기 추모록 ″간행사″

관리자
2020-08-11
조회수 219


글쓴이 : 법련사   

작성일 :  2016-09-07 오후 12:30:15


효봉(曉峰) 스님 열반 50주기 추모록


간행사


지난 삼국(三國)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불법(佛法)은 통일신라와 불교가 국교(國敎)였던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유구한 민족문화와 함께 찬란하게 꽃피었습니다. 그러나 배불숭유(排佛崇儒) 정책의 조선조에 이르러 그만 쇠잔해지다가 36년간의 일제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한국불교의 승풍(僧風)과 전통은 크게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이때, 효봉(曉峰) 스님은 1925년 38세의 나이로 금강산 신계사(神溪寺) 보운암(普雲庵)에서 석두(石頭) 선사를 친견하고, 파란만장한 속세의 인연을 훌훌 털고서 수행납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철두철미한 수행정진으로 ‘절구통 수좌’란 별칭을 얻으면서 10여 년간의 용맹정진 끝에 드디어 심안(心眼)이 열렸습니다. 은사이신 석두 스님을 비롯하여 1935년도에 이르러 제방의 큰 선지식으로 추앙 받던 오대산 상원사 한암(漢岩) 스님과 덕숭산 수덕사 만공(滿空) 스님에게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불조심인(佛祖心印)을 전수받으셨습니다.

그런후 남쪽으로 향한 운수행각의 발길은 불일 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의 근본도량인 승보종찰(僧寶宗刹) 조계산(曹溪山) 송광사(松廣寺)에 이르러 그만 멈추고서 삼일암(三日庵) 선원의 회주(會主)인 조실(祖室)로 주석(住錫)하셨습니다. 그리고 불일 보조국사의 목우가풍(牧牛家風)과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오늘날에 구현하고 불조심인(佛祖心印)인 조계선풍(曹溪禪風)을 계승할려는 원력을 세우셨습니다.

효봉 스님께서는 이로부터 10여 년 간 송광사 삼일암에 주석하면서 운수납자들을 제접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시대에 필요한 현전승보(現前僧寶)를 양성하고 제 2의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한국불교의 중흥(中興)과 선풍진작(禪風振作)에 매진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제시대에 생긴 대처승(帶妻僧) 제도를 조국의 해방과 함께 ″불법(佛法)엔 대처승은 없다″라는 기치아래 1953년부터 비구승(比丘僧)들의 주도하에 종단정화불사(宗團淨化佛事)를 시작하여 1962년에는 대한불교 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이란 통합종단이 탄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때 효봉 노스님께서는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시어, 종단 정화와 한국불교 발전의 대원력을 세우면서 동산(東山)· 금오(金烏)· 청담(靑潭) 스님 등과 함께 종단의 정화불사에 진력하셨습니다.

1962년 가을,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本寺)인 팔공산 동화사(桐華寺)가 종정스님의 주석사찰로 선정되면서, 노스님의 제자인 구산(九山) 스님께서 동화사 주지에 취임하셨고, 통영 미륵산 미래사(彌來寺)에 계시던 효봉 노스님을 대구 동화사(桐華寺) 금당선원(金堂禪院)으로 모셔와 미소실(微笑室)에 주석케 하셨습니다.

하지만 시절인연의 탓일까! 효봉 노스님께서 대구 동화사에서 조용히 임종하시리라 믿었던 은사스님은 문도들과 협의한 후, 1966년 5월 14일 노스님을 모시고 밀양 표충사(表忠寺) 서래각(西來閣)으로 이거하게 되였습니다. 그리고 그 해 10월 15일(음, 9월 2일) 오전 10시에 효봉 노스님께서 그만 입적(入寂)하시니 세수는 79세요, 법랍은 42년이였습니다.

노스님께서는 평소 제자인 구산 스님에게 불법승 삼보(佛法僧 三寶) 가운데 승보(僧寶)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시면서, 6.25동란으로 인해 그만 불타버린 승보종찰 송광사를 다시 중창하여 불조혜명(佛祖慧命)과 조계종풍(曹溪宗風)을 계승하고 대진선풍(大振禪風)하기를 간곡히 부촉하셨습니다.

그리하여 1967년 4월 15일 하안거를 기해 노스님의 부촉과 유훈에 따라 구산 스님를 비롯하여 많은 문도들이 승보종찰 송광사로 이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편 효봉 노스님의 유훈을 길이 계승하겠다는 문도들의 간절한 발원으로 밀양 표충사 도량에 자연거석으로 천진보탑(天眞寶塔)을 세우고, 또 효봉 노스님과 은사스님의 승적 본사인 조계산 송광사를 비롯하여 미륵산 용화사와 미래사에 각각 노스님의 사리탑과 행적비를 건립하였습니다.

마침내 1969년 4월 15일! 하안거 결제일을 맞이하여 제1총림인 가야산 해인사 해인총림(海印叢林)에 이어 승보종찰인 조계산 송광사에 역사적인 제2총림인 조계총림(曹溪叢林)이 설립되었습니다.

전국 수좌 모임인 선림회(禪林會) 회장 석암(昔巖) 스님과 발기인 스님들의 노력으로 대한불교 조계종 중앙종회의 의결을 거쳐, 조계총림 설립위원장에는 청담 스님이 추대되고, 초대 방장화상에는 구산 스님이 추대되었습니다.

이는 한국불교를 크게 중흥하여 불일 보조국사의 목우가풍(牧牛家風)과 조계종풍(曹溪宗風)을 드높이 선양하라는 노스님의 간절한 유훈을 받드는 효심어린 대작불사(大作佛事)이였습니다.

효봉 노스님께서 입적하신지 어느덧 5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에 지난 반세기를 돌이켜보면 소납이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4.19와 5.16혁명을 겪고 난후, 세월의 덧없음과 인생무상을 절감하며 정처없이 방랑하다가 잠시 전남 곡성 도림사(道林寺)에 머물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날 뜻밖에 광양군 옥룡면 백운산 상백운암(上白雲庵)에 용맹정진 끝에 큰 깨침을 얻고 보림(保任)을 하고 계신다는 구산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우여곡절 끝에 음력 12월 23일에 1,200m 고지의 눈 속을 헤매다가 구산 스님을 찾아뵙고서 사제(師弟) 간의 불연(佛緣)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해를 맞아 현호(玄虎)라는 불명(佛名)으로 사미계를 받고 난 후, 출가전부터 효봉 스님의 명성을 듣고 늘 한번 뵙고 싶었던 노스님을 경남 통영 미륵산 미래사(彌來寺)로 찾아가 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마치 어린 손자를 맞이하듯 자상한 할아버지처럼 수행정진에 귀감이 될 많은 법문을 들려주시던 노스님의 자용(慈容)이 어제련듯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후,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안거하던 시절과 밀양 표충사 서래각에서 열반에 드실 때까지 줄곧 시봉하게 된 노스님과의 귀한 법연(法緣)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에 노스님의 열반 50주기 추모법회를 맞이하여 노스님과 은사 스님의 막중한 법은(法恩)을 다시한번 회고하면서 비록 미숙하나마 ″효봉 스님 열반 50주기 추모록″을 불법승 삼보(佛法僧 三寶)전에 널리 법공양(法供養)을 올림니다.

나무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佛紀 2560年(2016년) 丙申年 九月 二日

효봉(曉峰) 노스님 열반 50주기 추모법회를 맞이하며

松廣寺 曹溪叢林 서울分院 法蓮寺 白雲山房에서

後孫 迷衲 玄虎는 老스님께 삼가 九拜合掌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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