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세 고승 : 전강(田岡) 대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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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2
조회수 452


글쓴이 : 법련사    

작성일 : 2004-09-06 오후 2:30:13

 


한국 근세 고승 : 전강(田岡) 대선사


24세에 "開眼宗師"…33세에는 조실에 올라 


거침없는 禪旨·格外의 機略은 禪門의 귀감 


전강(田岡), 20대 초반에 개안(開眼)을 이룬 현대 한국선종의 대표적 선사이다.그가 한창 견성(見性)을 위한 정진에 매진할 때는 경허, 만공, 혜봉, 한암, 용성,보월 등 당대의 선지식(善知識)들이 각지에서 선지(禪旨)를 드날리고 있던 시기였다. 전강은 이들 선지식들을 일일이 찾아 자신의 오도적(悟道的) 체험을 점검 받음은 물론 더 나아가 그들의 내부에 가차없이 돌팔매를 날림으로써 당시 개안종사(開眼宗師)들의 미진한 번뇌까지도 불태워주는 거침없는 선기(禪機)를 갖추고 있었다. 그의 이런 면을 들어 많은 사람들은 전강이야말로 한국선종은 물론 불조의혜맥(慧脈)을 이은 유일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번득이는 선지, 살불살조(殺佛殺祖)의 파격, 생사를 개의치 않는 치열한 정진력등 전강은 선납자(禪衲子)가 갖추어야할 모든 것을 구비한 "선가(禪家)의 대종장"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그만큼 그가 보여준 70여 년의 살림살이 그대로가완벽한 선지식의 전형이라 할 정도였다. 그의 행적을 가만히 살펴보면 때론 육조(六祖의) 돈오정신(頓悟)정신이, 때론 임제의 부정(否定)정신이 올곧이 배어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허와 만공, 한암이 떠나고 난 후 한국선불교의 공허함을 메운, 그리고 육조(六祖)의 견성주의(見性主義)와 마조(馬祖)의 즉심즉불(卽心卽佛), 임제의 무위진인(無位眞人) 사상을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선종(禪宗)의 혜맥(慧脈)을 정립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전강은 세속의 나이 스물 넷 되던 해에 개안을 하고 오도송(悟道頌)을 읊었으니 그 내용은 이렇다. 


어젯밤 달빛은 마루에 가득차고 

창밖의 가을 꽃은 눈처럼 희다. 

부처와 조사도 신명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고 있다. 

昨夜月滿樓 

窓外蘆花秋 

佛祖喪身命 

流水過橋來 


열 여섯의 나이에 삭발을 하고 제산 화상이 주석하던 직지사로 간 이후 어묵동정(語默動靜)에 일여(一如)하게 계속해온 정진의 고삐가 마침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수행처마다 엉덩이살이 썩어 문들어지도록 무섭게 정진을 했던 전강이었기에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견성의 일미(一味)를 맛본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일 수없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앙상한 고목이 되었던 그, 보덕사에서 정진을 하면서"드디어 내가 무자화두(無字話頭)를 깨쳤다"라는 관념적 오만의 장애를 극복하고,곡성의 태안사로 옮겨 정진을 계속했다. 


어느 날 전강은 문득 들고있는 화두마져 사라지는 절대고독의 순간으로 치닫고있었다. 찰나 …, "운무(雲霧) 중에 소리를 잃었으니 어떻게 해야 소리를 찾느냐?담 넘어 참외를 따오너라."는,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쳐가는 자증(自證)의 소리를 듣는 순간 홀연히 무자(無字)의 밀의(密意)가 도드라지게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으니, 실로 구름이 걷힌 후 자태를 드러낸 청산을 보듯 출신활로(出身活路)의희열을 맛보는 순간이었다. 전강은 당시 간득일경(看得一境·어떤 것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름)의 느낌을 "만일 누군가 내게 조주의 무자를 묻는다면 다리 밑 푸른물은 바위 앞을 가고 있다고 답하리(若人問趙州意 脚下綠水 岩前去)"라고 노래했다. 


시리게 부신 가을 달빛 아래에서 눈처럼 부서져 내리는 갈대꽃을 바라보는 서정(抒情), 이 때의 전강은 이미 이전의 전강이 아니었다. 간간히 미간을 때리는 낙옆과 가을 바람을 바라보다 문득 요기(尿氣)를 느꼈다. 법당 앞이었지만 전강은지체없이 고이춤을 풀었다. 후두두둑 … 낙옆을 때리는 오줌 줄기는 한 밤의 적막을 깨뜨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누구야, 어느 미친 놈이 법당앞에서 오줌을 누고 있어!" 쇳소리가 섞인 원주(院主)의 고함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그 고함을 개의할 전강은 이미 아니었으니, 천천히 고이춤을 여미기가 무섭게벽력같은 일할(一喝)을 내질렀다. "산하대지가 비로법신체(毘盧法身體)일진대 그러면 어디에다 오줌을 누란 말이냐." 제불과 중생은 본래 다르지 않고 산하와 나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없는 경지(山河自己 寧有等差)를 지칭하는 전강의 사자후에원주는 기가 꺾여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소란스러움에 밤잠을 설친 대중들이 몰려나와 마치 성난 짐승처럼 뭇매질을 해댔으니, 겨우 목숨을 지탱할 정도로 앙상해진 그의 육신에 불그락푸르락 물이 들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들의주먹과 발길질은 결코 전강의 법신에 솟아난 터럭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으니 …. 


견성의 일미(一味)를 맛본 전강이 수행의 범위를 넓힌 것은 정해진 수순이라 할터. 당대의 내로라하는 선지식들을 찾아 당당하게 거량을 청했다. 선지식들만이가질 수 있는 인가(認可)의 과정, 즉 깨달음의 실체를 확인받는 과정을 하나하나밟아 나갔다. 


마곡사 아래 구암리의 한 토굴에 주석하는 혜봉(慧峰)을 찾아 대뜸 "조주(趙州)의 무자 의지(無字意志)는 천하 선지식도 반쯤밖에 이르지 못했다"며 "참으로 진실하게 일러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혜봉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무(無)" 한마디로 전강의 횡포를 받아 넘겼다. "그것은 반쯤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 그러면 네가 말해보라" "무(無)-."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서로를 확인하는 기쁨을 나누었다. 


한 번은 한암 노사(漢岩老師)를 찾았다. 한암은 전강의 오도적 치기(稚氣)를 한눈에 알아채고 물었다. "어떤 것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인고?". 전강은 세 번손벽을 치며 문밖으로 나갔다. "과연 사람을 물고 다니는 사자(獅子)로군." 한암역시 오랜만에 "물건"을 만난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어느 날 전강은 수덕사 금선대로 만공(滿空) 화상을 찾았다. 만공이 물었다."부처는 계명성을 보고 오도를 했는데, 자네는 저 많은 별들 중에 어느 별을 보고 깨닫겠는가?" 전강은 즉시 화상 앞에 허리를 구부려 땅에 떨어진 물건을 찾는 시늉을 했다. 이를 본 만공은 "부처도 훔치고 조사도 훔칠만 하다. 선재로다."라고 기뻐한 후 인가(認可)의 전법게(傳法偈)를 내렸으니, 그 내용은 이러하다. 


부처와 조사도 전하지 못한 것 

나 또한 얻음 없네. 

이 날은 가을빛도 저물어 가는데 

뒷산 봉우리에 원숭이 울음소리. 

佛祖未曾傳 

我亦無所得 

此日秋色暮 

猿嘯在後峰 


전강은 1898년 동짓달 전라남도 곡성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세속 이름은 정종술. 가난했지만 행복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일곱 살 되던 해 어머니와사별의 아픔을 맛보았다. 두 살 난 여동생도 계모 밑에서 천덕꾸러기로 자라다가말도 제대로 못하고 비쩍 말라가더니 다섯 살이 되던 해 죽고 말았다. 그날 밤 거적에 둘둘 말린 여동생의 주검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광경을 지켜본 종술은 삶과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한 깊은 고뇌를 경험했다. 서당이나 학교에 갈 처지가 못돼어깨너머로 글을 배우면서도 늘 계모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때때로 어머니의 산소를 찾아가 목놓아 울부짖기도 했다. 그러기를 몇 해, 이 번엔 아버지가 돌연 세상을 떠나자 계모마저 도망을 쳤다. 이복동생 종석이와 함께 고아가 된 종술의 기구한 인생행로는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시작됐다. 아버지가 남겨 놓은 땅 몇 마지기 조차 욕심 많은 5촌 당숙에게 빼앗기고, 알거지 신세가 되어 친척집을 전전했지만 입에 풀칠하는 것조차 어려웠던 시절인지라 가는 곳마다 문전박대를 당했다. 종술은 할 수 없이 동생 종석을 친모인 계모의 집에다 떼어놓고 방랑의 인생길을 걷기 시작했다. 


떠돌이 생활을 하던 중 우연히 유기그릇을 만드는 아저씨를만나 풀무질을 배우는 인연을 맺었다. 이 유기그릇 장사 꾼(김천택)과의 만남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는 불연(佛緣)의 시작이었을 줄이야. 주인을 졸라 유기장사를 하던 종술은 길거리에서 장편월이라는 스님을 만났고, 그의 절로 들어가 행자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대처승이라는 점에 환멸을 느끼고, 그곳을 나와 가야산 해인사로 향했다. 해인사에서 인공 스님을 은사로 행자생활을 하게 된 종술은 경학이나 염불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다음해 초파일 인공 스님을 은사로 응해 스님을 계사로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니, 그의 나이16세였다. 마침 친일승 이회광이 해인사를 장악하고 있던 터라 바른 선승들은 하나 둘 해인사를 떠났다. 전강도 제산화상이 주석하고 있는 김천 직지사로 정진의장소를 옮겼다. 


동진 출가하여 20대에 견처(見處)를 얻은 후 33세의 젊은 나이에 범어사 조실에 추대된 전강. 그의 삶은 이처럼 출가 이전의 고통스런 시절과 출가 이후의 불퇴전의 용맹정진, 그리고 견처를 이룬 후에는 스러져가는 한국 선맥에 돈오견성의 진면목을 거듭 세우려는 대원력으로 점철됐다. 


훗날 사자전승(師資傳承)의 이상적인 전형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수제자 송담(松潭)을 개안종사로 키우려는 전강의 정성은 선가(禪家)에서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 징집으로 제자가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시정에서 장사를 하며 뒷바라지를한 일화는 두고 두고 사도의 사표가 되고 있음이다. 


63세부터 인천 주안에 용화사 법보선원을 건립해 입적할 때까지 담대하고 활발한 선풍으로 수많은 참선학인을 제접하고 배출한 전강은 1975년 1월 13일 대중을불러 앉힌 후 "어떤 것이 생사의 큰 문제인가(如何是生死大事)? 어억(喝)! 구구는번성81(飜成八十一)이니라."라는 입적게를 내린 후 좌탈입망했다. 이 때가 세수77세, 법납 62세. 입적하기 전 "내 몸에서 사리를 수습하려고 하지 말라. 육체를태워서 서해에 뿌리라."고 당부했고 제자들은 스승의 유지를 지켰다. 


비록 육신은 갔으나 전강의 법신은 아직도 우리와 함께 남아있다. 오늘도 인천용화사 법보선원에서 울려나오는 육성법문은 그의 법신이 언제나 함께하고 있음을웅변으로 입증하고 있다. 육신을 버린 스승을 마치 살아있는 양 조실 스님이라고칭하면서 모시고 있는 수법제자 송담의 지극한 마음이 아니더라도 전강의 거침없는 선지(禪旨)와 은산철벽의 조사관이라도 시원스레 타파해버릴 걸림없는 선기(禪機)는 오늘의 수좌들에게 영원한 혜등(慧燈)으로 남아있다. 



※연보 

1898년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출생 

1913년 해인사에서 응해 스님을 계사로 수계 

1921년 곡성 태안사에서 개오 

1923년 수덕사에서 만공 스님의 인가를 받음 

1932년 범어사 조실 추대 

1962년 인천 주안 용화사 법보선원 건립 

1975년 1월 13일 세수 77세, 법랍 62세로 입적 



보화의 ″해탈자재″ 한산·습득의 ″걸사정신″ 겸비 

전법제자 송담에 기울인 정성 ″선방의 화제로″ 


전강(田岡)은 흔히 선종 제77대의 법맥을 전승한 적통자로 일컬어진다. 경허가 입적한 뒤 만공의 뒤를 이어 혜월, 한암 등이 선종의 중흥에 힘쓰다가 하나 둘 인연을 다하게 되자, 자연 이들과 교유하며 개안의 경지를 교섭했던 전강에게 선종의 혜맥을 이어갈 짐이 돌아간 셈이다. 돌이켜 보면 전강이 아니었던들 현대의 선종사는 매우 적막하고 아득한 지경에 빠져 들었을지도 모른다. 정맥(正脈이)흔들리면 으레 사선잡배(邪禪雜輩)들이 설치게 마련인 것이니 현대 한국선종사는 전강으로 인해 그 명맥을 공고히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 선종사(禪宗史)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광활한 것이었다. 


특히 경봉(鏡峰)의 법광을 치유케 한 일화는 선방의 화제로 지금까지도 전해내려 오고 있고, 한 때의 무애가풍은 마조(馬祖) 문하에서 경계를 넘은 후 각지를 떠돌며 기이한 무애행(無碍行)을 보였던 보화(普化)의 해탈 자재함과 맥을 같이하고 있음이다. 이 뿐이랴, 전강의 운수는 마치 한산과 습득의 걸사(乞士)정신을 다시 보는 듯 하였으니 이는 돈수(頓修) 경지에 오른 이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징표일 것이리라. 


이러한 선사의 만행은 오도적 희열에 빠져 자칫 놓치기 쉬운 가아(假我)에 대한 치열한 해체작업에 다름 아니었다. 단순한 만행을 넘어서 말 그대로 보임(保任)에의 직결이었으니, 견성을 향한 치열한 도전은 있으되 견성실험의 고뇌를 소홀히 하기 쉬운 선문(禪門)의 함정을 전강은 뿌리째 뽑아내려 했던 것이다. 


전강이 해인사 홍도여관에서 잠시 식객으로 머물고 있을 때였다. 때 마침 이 여관에는 당대의 석학 석전 박한영과 육당 최남선 등이 머물고 있었는데 전강이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다고 했는데, 그 마음은 누가 짓겠습니까?" 

전강의 질문에 선사들은 갑작이 말을 잃은 채 냉냉히 앉아 있었다. 다만 석전만이 잠시 후 "영신(전강의 법명)은 소문대로 개안종사야."라며 웃음을 지었다. 


근원적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는 명확한 해답을 할 수 없음을 석전은 이미 알고있었음이다. 이처럼 전강은 선사들과 법을 논하고 문답하는 상량(商量)을 즐겨했으니 이 모두가 자신의 경계를 확고히 하고자 하는 투철함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범어사에 잠시 머물 때였다. 이미 임제를 방불케하는 선기(禪機)가 몸에 익어전강의 무애행이 절정에 올라 있을 무렵이었는데, 당시 기유담(奇乳潭)이라는 스님이 전강의 남루한 차림을 보고는 놀라지 않고 오히려 곡차(穀茶·술)를 대접했다. 이를 거절하지 않고 한 잔 들이키자 방안에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이때 화엄강사로 널리 알려진 경명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그 광경을 보고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예가 어디라고 감히 술을 마시고 있는가." 

고함이 얼마나 컸던지 한동안 방안에 여운이 맴돌았다. 전강이 잠시 후 대꾸를했다. 

"그래, 내가 술 마시는 일이 그렇게 못마땅하다면 상본화엄(上本華嚴)이 미수진품(微塵數品)인데 이 술잔은 그 몇째 품에 속하는가?" 


술 마시는 일이 화엄의 몇 번째 품에 속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경명은 넋을 잃은 사람처럼 말을 잃고 서 있었다. 전강은 또 한 잔을 입 안에 털어 넣은 후 다시 한 마디를 던졌다. 

"바다 밑 진흙소는 용을 이루어 가는데 절름발이 자라는 눈앞의 그릇으로 들어가는구나(海底泥牛 成龍去 跛鼈 依前入綱羅)." 이 뒷 구절은 아마도 경명을 두고하는 말이었으니, 그의 행주좌와에 녹아있는 덕숭의 가풍이 일순간 격외(格外)의일구(一句)가 되어 빛을 발한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전강이 평생 사용한 화두는 ″판치생모(板齒生毛)″였다. 


구년 동안 소림에서 면벽(面壁)만 하고 있었으니 

어찌 머리를 맞대고 일구를 전한 것만 같으리요 

판치(板齒)에 털이 솟는 것도 신기한 일인데 

석인(石人)은 사가(謝家)에 배를 밟고 지나간다. 

九歲少林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板齒生毛猶可事 

石人踏破謝家船 


그가 이 판치생모를 오도적 도구로 사용한 배경은 마치 조주가 개에게 불성이 있는가의 물음을 한 마디로 부정했듯이 판치생모가 여러 불보살과 조사들의(諸佛諸祖)의 면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달마가 소림굴에서 구년 간 면벽 한 것을 살아있는 일구(一句)를 전한 바 만 못하다고 호기를 부리면서, 오직 그가 평생을 사용한 판대기 이빨에 털이 솟는 소식을 알라고 강조하고 있으니 가히 전강이 아니면 하기 어려운 격외의 할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전강은 후학들에게 이 화두가 불타가 이룩한 자유스러운 자성의 공간에 도달하는 통로임을 늘 강조했다. 


전강의 법어는 매우 독창적이다. 조사의 어록들이라 해도 그를 통하기만 하면 새로운 맛을 더했다. 이미 그 뜻이 알려져 사구(死句)가 되어버린 화두라 할지라도 자기개오(自己開悟)에서 나오는 살아있는 그의 음색이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전강은 깨달음을 이루는데 있어서 경험이나 지식을 철저히 배제했다. 알음알이를 경계하는 그의 엄격함은 육조 혜능의 그것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언하대오(言下大悟), 일초직입 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와 같은 전강의 언어들은 단박깨달음에 대한 그의 불같은 의지를 담고 있다. 


"참선은 조사관(祖師關)을 뚫는 것이요, 묘오(妙悟)는 중생의 마음 길을 아주 끊는 것이다. 그래서 조사관이란 뚫는 것이지 도저히 지혜로는 해석이 되지 않는다." 물은 직접 마셔 보아야 그 참맛을 알 수 있듯이 직접 체험하지 않고 이리저리 듣고 따져서 그 맛이 알아지는 게 아니라는 전강의 주장은 당시 선지식들은 물론이요 후학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선배 선사들의 허물을 지적하는가 하면 여러 선방의 조실을 보며 무애한 선기를 한껏 내뿜었다. 실로 구구상투 기기상응(句句相投 機機相應), 즉 어떤 말을 당해서도 즉시에 답을 하고 어떤 경우를 당해서도 알맞은 대책을 내어놓는, 또 놓고 붙잡고 긍정하고 부정하는데 걸림이 없는 파주(把住)와 방행(放行)의 경지를 전강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용성 화상이 망월사 조실로 있을 때, 때마침 한 자리에 있던 전국의 선지식들에게 생사고해를 헤매면서도 순간의 쾌락에 끄달려 아둥바둥 살고 있는 중생의사는 모습을 비유한 안수정등(岸樹井藤)을 거론하며 질문을 던졌다. 

"등나무 넝쿨에 매달려 꿀 방울을 먹던 그 사람이 어떻게 하면 살아 나겠느냐?" 


만공이 답했다. "지난 밤 꿈 속의 일이다.(昨夜夢中事)" 이어 혜봉이 답했다."부처는 다시 부처를 짓지 못한다.(佛不能更作佛)" 혜월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모를래야 모를 수 없고 염득불명(念得不明)이니라."라고 답했다. 보월이 답하기를 "어떤 것이 우물인가?(何是入井)"라고 했고, 이어 고봉은 "아야 아야."라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전강이 답을 했으니 "달다!"였다. 


극한 상황에 이르러 어떻게 하면 살아 남을 수가 있을까를 화두로 물은 이 질문에 다른 선사들이 상징적 표현이나 환상 또는 암시적으로 답하고 있음에 비해 오직 전강만이 그대로 ″달다″고 말한 후 자신의 오도송을 읊었으니, 이는 전강의 뛰어난 서정감각은 물론이요, 사물이나 상황을 직관하여 언하(言下)에 깨달음을 얻는 특출함이 돋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음이다. 


한번은 전강이 만공과 보월이 있는 자리에서 경허의 오도송에 허물이 있다며 문제를 들고 나왔다. 

"″문득 콧구멍이 없는 소라는 말에 / 이 우주 전체가 내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 들사람들이 한가롭게 태평가를 부른다.(忽聞人語無鼻孔 頓覺三千是我家 六月 岩山下路 野人無事太平歌)″라는 경허의 오도송 중콧구멍이 없다에는 없다(無)는 허물이 있고, 이 우주가 내 집임을 깨달았다(頓覺是我家)에는 각견(覺見)의 허물이 있으며, 무사태평가에도 또한 허물이 있으니 이런 허물 때문에 생사묘법은 못 보고 제 자정식(自淨識)을 못 건너가게 가로막고 있으니 모든 후학들은 이 함정에서 빠져 버립니다. 그러니 후학들을 바로 지시하여야 하겠습니다." 


이때 보월이 신경질적으로 말하기를 "그 사람 참으로 공연한 말을 제멋대로 하고 있네."라며 핀잔을 주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만공이 이르되, "그러면 자네가 한 번 일러 보게."라고 하였다. 이에 전강이 "유월 연암산하로( 岩山下路)까지는 그대로 두고 마지막 장도 다시 채울 것이 아니라 역시 그대로 놔두고 제도리만 이르겠습니다. ″여여 ∼ 여여로 상사뒤여 ∼ ″"라고 노래를 불렀다. 만공이 듣고 있다가 "허, 이 사람. 노래를 부르는가. 아 여여로 상사뒤여가 노래가아닌가? 노래를 부르는 것은 무슨 뜻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전강은 다시 춤을 추며 노래 가락조로 "여여, 여여로 상사뒤여∼"라고 하였다. 만공이 가만히 지켜보다가 "적자농손(嫡子弄孫)일세"라며 인가(認可)했다. 


좋은 말은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말탄 사람의 뜻을 안다고 하였으니, 노래하고 인가하는 만공과 전강의 경지는 그대로가 여세양마 견편영이행(如世良馬 見鞭影而行)이었음이다. 


수제자 송담(松潭)에 대한 전강의 애정은 피와 살을 나눈 부모보다도 더 깊은 것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거듭하면서도 제자의 수행을 돕기 위해 기울인 그의 행적은 실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혹시 송담에게 해가 있을까 싶어 허름한 집 천장에 숨겨두고 스스로 구멍가게를 열어 수발을 한 일화는 두고두고 화제거리로 남아있다. 전강은 낮이면 장사를 하고, 밤이면 방으로 돌아와 눕지 않고 가부좌를 튼 채 정진을 계속했다. 때때로 제자의 정진을 독촉했고 다정다감하게 일러주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전강의 눈에 송담은 법기(法器)로 보였다. 앞으로 한국선종을 이끌어갈 재목임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었다. 그의 예측대로 송담은훗날 한국 선종의 혜맥을 이끌어가는 거목이 되었다. 송담이 10년 묵언정진(默言精進)을 하고 있을 때, 전강은 너무 오래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좋지 않음을 일러주면서 ″말을 하면서도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고 말하지 않는 곳에 시비선악(是非善惡)을 가리는 말이 있을 수 있다″고 설득, 제자가 묵언이라는 또 하나의 경계에 끄달리는 것을 경계했다. 


이러한 스승의 배려에 힘입어 마침내 송담은 홀연히 생사의 대의를 깨쳤으니,10년 묵언수행을 깨고 진여대도(眞如大道)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깨달음의 노래를 읊었으니, 그 전문은 이러하다.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리는데 

겨울 기러기 울며 북쪽 하늘로 날아가네. 

무슨 일로 십년간 애를 썼는가? 

달 아래 섬진대강이 유유히 흐르도다. 

黃梅山庭春雪下 

寒雁淚天向北飛 

何事十年往費力 

月下蟾津大江流 


전강은 현대 한국선종의 혜맥을 이은 선지식으로서 뿐만 아니라 육조와 임제의 사상적 깊이를 넘어서서 오늘의 언어로 재창조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전강의 진면목을 온전히 드러냈다고는 할 수 없다. 그의 진정한 모습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 스스로가 그의 평생 화두였던 판대기에서 털이 솟는도리, 즉 판치생모(板齒生毛)의 소식을 깨달아 아는 길밖에는 없다. 그 경지에 이르고서야 비로소 전강의 진면목과 해후하는 기쁨, 그리고 대해(大海)의 큰 파도가 만들어내는 흰 물결이 하늘에 넘치듯 그의 영골(靈骨)이 온 우주에 충만해있음을 확연히 아는 희열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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