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九山)스님 법어집 간행에 얽힌 이야기

관리자
2020-08-11
조회수 824

글쓴이 : 불일출판사   

작성일 : 2010-12-07 오전 9:58:56


구산(九山)스님 법어집 간행에 얽힌 이야기

- 청신녀 정보경화 100재 법공양(法供養) 발원문 -



지난 1983년 봄. 불일보조국사 종재일(佛日普照國師 宗齋日)을 기해서 저희들의 은사(恩師)이신 구산(九山)스님의 간곡한 뜻에 따라 승보도량 송광사 조계총림(僧寶道場 松廣寺 曹溪叢林) 제8차 중창불사(重創佛事)를 발원하고 봉행할 때의 일이다.


나는 은사스님의 간청에 의해 부득이 송광사 주지(住持)소임을 맡았다. 동족상쟁인 6.25사변과 여순 반란사건으로 인해 도량의 중심부가 크게 소실된 송광사를 다시금 이 시대에 걸맞은 수행도량으로 중창하기 위한 원력으로 역사적인 제8차 중창불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평소 송광사 주지실(住持室)로 사용하던 차안당(遮眼堂)을 선원(禪院)의 부속 건물로 활용토록 하고, 6.25사변 전 채마밭으로 가기 위한 개울가 통나무다리의 문간채인 뒷방을 주지실로 쓰기로 했다. 누가 봐도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 승보종찰인 송광사 조계총림의 주지실로 사용키에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송광사의 중창불사를 원만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도량 전체가 그대로 송광사 주지실이란 신념으로 살아야겠다는 소박한 생각뿐이었다. 이를 지켜본 총림 방장(方丈)화상인 은사스님은 어느 날 경책의 말씀으로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나에게 손수 써 주셨다.


인청계성성삼매(因聽溪聲成三昧)하고

단간월색증보리(但看月色證菩提)하라.


졸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를 듣고선 삼매를 이루고

휘영청 밝은 마음 달을 보고선 보리를 증득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개울가 문간방이었던 주지실에 얽힌 이야기는 자못 흥미롭다.

송광사 ″산밭등″이라는 채마밭으로 가는 통나무다리의 문간채는 송광사 도량의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의하면 ‘남방(南方)을 화방(火方)’이라 한다. 이 화방(火方)인 남쪽에 다리를 놓았으니 이로 인해 6.25사변 때 송광사가 크게 화마(火魔)를 입고 소실되었다는 속설이 전해져 왔다. 때문에 여순 반란사건 후에는 그 통나무다리를 철거하고 문간채를 땔나무 창고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1969년 하안거를 기해 송광사에 종합수도원인 조계총림이 설립되자, 그 땔나무 창고를 목욕실로 개조하여 10여 년간 사용하였고, 대중목욕실을 새로 짓고 난 후에는 노스님들이 거처하는 뒷방으로 다시 꾸며 활용하였다.


이런 구구절절한 사연이 깃든 개울가 문간방이 결국 송광사 조계총림의 주지실이 되고, 여기에서 역사적인 8년간의 송광사 제8차 중창불사가 이룩되었으니 어찌 흥미롭지 않겠는가?


그러나 송광사 제8차 중창불사를 발원하였던 구산 방장스님께서 1983년 12월 16일(음력 11월 13일) 오후 6시 25분 홀연히 입적하시자, 슬픔에 잠긴 문도들은 다 같이 뜻을 모으고 스님을 따르던 전국 불일회원들은 스님의 탑을 세우는 간절한 마음으로 더욱 신심을 발휘해 제반 중창불사를 원만히 이룩하였다.


그런데 송광사의 중심건물인 대웅보전이 장엄하게 신축되고 중창불사가 마무리 단계에 이른 어느 날 밤. 은사스님의 유품들을 간직하며 살고 있던 주지실이 그만 불에 타 전소되고 말았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나는 망연자실 실로 기가 막혔다. 송광사 중창불사에 관계된 모든 서류나 개인적인 소지품들은 그만 두고서라도 은사스님의 귀중한 유품과 많은 법어집(法語集)과 녹음테이프 등이 다 타 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고 서성대다가 깜짝 놀라 깨어보니 한바탕 꿈이었다. 온몸에 전율이 흐르고 긴 한숨만 나왔다. 식은땀이 흐르고 정신이 아찔하였다.


한바탕 꿈이었기에 천만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은사스님의 어록(語錄)과 법어집을 속히 간행해야겠다는 결심과 다짐이 절절하였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는 게으르고 어리석은 제자들을 일깨우려는 은사스님의 노파심절한 몽중법문(夢中法門)이 아니었을까 싶다.


곧 바로 ‘구산선사 문집간행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먼저 은사스님이 남기신 법문자료들을 모아 복사본을 만들고 일차적으로 한문으로 된 법문들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그걸 다시 문도들이 함께 모여 윤문하고 감수하면서 은사스님의 제11주기 추모법회를 기해 편집 간행한 것이 오늘날 구산선사 상당법어집인 “구산선문(九山禪門)”이다. 그리고 뒤이어 간행 유포한 것이 구산선사 수시설법집인 “구산선풍(九山禪風)”이다. 그때의 꿈땜을 이렇게 단단히 한 셈이다.


현재의 송광사는 8차 중창불사 때 주지실로 사용할 ‘목우헌(牧牛軒)’을 당당하게 신축하였으며, 그때 그 문간방이었던 주지실은 송광사의 옛 이름인 길상사(吉祥寺)를 상징하여 ‘길상헌(吉祥軒)’이라 이름 하여 새로 짓고 지금은 귀빈실로 사용하고 있다.


옛말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은사스님 가신지 벌써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다시 은사스님의 제27주기 추모법회를 맞이하여 스님께서 생전에 손수 쓰신 법어집인 “석사자(石獅子)”를 거듭 간행하여 널리 유포하려 하니, 은사스님의 자용(慈容)이 살아생전처럼 역력하게 떠오른다.


지난 2010년 10월 1일(음력 8월 24일) 관음재일 오후 6시 35분. 효봉(曉峰)스님과 구산(九山)스님을 비롯하여 효봉 문도스님들을 5대(五代)째 봉양하면서 반세기 50년 동안 함께 살아 온 정보경화(鄭寶鏡華) 보살님이 99세를 일기로 조계산 송광사 탑전에서 조용히 입적하였다.


정보경화 보살님은 살아생전에도 평소 푼푼히 모은 정재로 구산스님의 법어집인 석사자(石獅子)와 효봉스님 법어집과 보조국사 법어집 등을 널리 법공양(法供養)을 올렸었다. 그리고 보살님은 생전에 당신의 49재 때에는 “효봉스님 법어집”을, 100재 때에는 “구산스님 법어집”을 법공양하기를 발원했었다.


하기에 청신녀 청주유인 정보경화 영가의 명복과 왕생극락을 염원하면서 보살님의 뜻에 따라 보살님의 49재에는 효봉스님의 법어집을 법공양 올렸으며, 이제 다시 보살님의 100재를 맞이하여 구산스님의 이야기인 "석사자(石獅子)"를 법공양 올리오니, 이 인연공덕으로 이 법어집을 접하는 모든 이들이 삼보(三寶)의 지혜와 자비광명 속에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를 증득하고 필경에는 원성불 도중생(願成佛 度衆生)하기를 간절히 두 손 모은다.


나무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마하 반야바라밀.



* 구산 선사(九山 禪師) 제27주기 추모법회일
불기 2554년 (2010년) 12월 18일 (음. 11월 13일) 토요일






* 청신녀 청주유인 정보경화(鄭寶鏡華) 100재일
불기 2555년 (2011년) 1월 8일 (음. 12월 5일) 토요일


승보도량 조계산 송광사 조계총림
적광탑전 시자 현호(玄虎) 분향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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